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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암 석조불상군 (서산) - 한국 마애불의 변천과 미륵신앙 연구

by live-breaking-news 2025.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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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암 석조불상군 (서산)

 

 

1. 신앙적 성격 한국의 마애불이 갖고 있는 의미는 신앙적 성격 외에도 당시 사회의 정치적 문화적 성격을 담고 있다. 어느 시대에 조성되었는지에 따라 불상의도상과 의습을 통하여 당시 유행했던 신앙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성된 시대의 불상 수인의 유형과 불상의 존명을 파악을 통하여 신앙의변천사를 알 수 있다. 조성 초기 삼국시대는 불상의 종류와 관계없이 대부분 항마촉지인 유형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이 시기 조성된 마애불의 수인을 통하여 부처의 명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명문을 살펴보아야 한다. 삼국 중 유일하게 명문이 남아있는 신라시대 조성된 마애불로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에서 ‘선지식은 미륵을 만나기를 염원하고 있다.’는내용의 명문을 통해 당시 조성된 불상의 명호와 함께 미륵신앙과 아미타신앙이 유행되었음이 유추된다. 명문에는 북쪽 암벽에 부조된 상은 미륵반가사유상으로 미륵불임이 명시되어 있다. 반가상은 삼국시대에 유행하였으며,서산 용현리 마애삼존여래불의 좌협시 보살, 태안 동문리 삼존불 중 중앙미륵반가사유상,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의 본존불의 마애불에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정황을 통해 당시 미륵신앙이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미륵신앙이 유행한 원인은 당시 시대 상황과 연관된다. 삼국전쟁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로 국토를 미륵 용화 세계로 해석하고, 전륜성왕사상)에 의해 국가 간의 병합을 인정하는 추세였다. 이 때문에 각국은 미륵신앙을 수용하여 왕실의 왕권 강화의 사상적 뒷받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민중들의 경우 전시의 상황과 맞물려 당시의 혼란과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한 미래를 갈구하는 염원을 담아 미륵을 신봉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통일 이후 신라의 불교문화는 왕실을 중심으로 활성화되며, 중국과의 활발한 문화교류로 불상의 도상과 불상의 수인이 다양해진다. 이시기 이후본존불의 수인이 변화되고 있음이 보여진다. 석굴암 본존상에서 항마촉지인 한 수인은 양식적 완성을 이루어지고 한국 불상에서 그 양식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변화하고 있는 아미타불의 아미타인은 아미타불을 나타내는 수인으로 각 시기에 따라 손 집는 위치에 차이가 있다.

 

“시대별로 유행하였던 부처님 수인을 살펴보면 삼국시대에는 여원인 시무외인이 유행하였고, 통일신라 8세기에는 주로 항마촉지인이 많았다. 9세기 이후에는 비로자나불 수인인 지권인이 유행하였다. 고려시대에 와서는다양한 수인들이 유행하였으며, 조선시대 들어와서 부처님의 존명과 맞게수인이 정립되었다.” 수인의 변화는 불교의 신앙적 성격과 밀접함을 보이고 있다. 마애불이 삼국과 통일신라를 지나는 동안에 도상의 변화가 이루어지고,그 중 약함을 든 유형은 가장 한국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약함을 든 유형의 마애불은 무병장수를 원하는 현세 구복적인 바람이 주축을 이루는 신앙으로 약사불은 8세기 중반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방불의 유행으로 약사불을 조성하였으며, 동쪽에서 약함을 들고 있는 약사 유리광보살의 모습이다.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동면상, 칠불암 사방불의 동면상, 남산삼릉계 약사상을 들 수 있다. 8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수인의 경우 항마촉지인과 약함을 합친 경우가 있지만, 왼손의 약함을 들고 오른손에 설법인의 수인을 한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통일신라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약사불이 많이 만들어지나사방불의 명칭은 명문이 없어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관불삼매해경’ 등의 경전을 통하여 명호를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방불은 사방으로확대되어 가는 정토관념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 계속되는 기근과 역병, 왕실의 권력다툼으로 인한 사회혼란으로 말미암아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구제의 성격을 띤 약사 신앙의 지방토착화로 인해 마애불의 수인 또한 다양화된 것으로 이해된다. 마애불에서 나타나는 삼국시대 불교신앙은 미륵신앙이 주를 이루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다양한 신앙과 함께 도상이 들어와 수인의 큰 변화가 있었는데 아미타 신앙의 경우 수인의 변화와 함께 9세기에 들어 한국적인 색채가 마련되었다. 또한 9세기에는 사회적 혼란기로 구복적인 의미가 강 약사신앙이 증가하였고, 이런 특징이 마애불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숭유억불 정책과 유교의 정치적 이념 수용으로 마애불의 조성은 쇠퇴하고 그 형태는 토속화되어 조각 수법이 낙후되며 마애불은민불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삼국시대 신라의 귀족층이 마애불 조성에 참여하였다. “8세기 들어오면서왕실과 귀족층의 불사는 더욱 활발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경덕왕 대(75) 조성되었다고 추정되는 굴불사지 사면석불과 석굴암, 불국사는왕실이나 귀족과 관련된 사찰로 보인다. 삼국유사를 통하여 표면적으로는김대성이 전생과 현생의 부모를 위해 만들었다는 석굴암과, 불국사의 경우‘왕실부모의 명복과 호국사찰의 동기로서 창건되었다’고 설명된다. 두 곳의불사를 원만히 이루기 위한 대규모의 인력과 물자는 왕실이 아니고야 할수 없으며, 김대성이 죽고 나서 왕실이 창건을 마무리 지었다는 것을 일연의 삼국유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9세기에 들어 왕실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마애불 조성 주체가 다양해진다. 왕권의 권위하락, 왕실과 관련된 지역이 왕실을 위해 발원하고 지역에조성을 하게된다. 함안은 10정(十停)이 위치한 지방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수행한 곳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함안군의 관리가 왕을 위하여 마애불을 조성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109)“호족이나 지역의 촌주가 발원한 용봉사 마애불 조성기를보면 소성왕 1년(799) 대백사 원오법사와 장진대사가 발원하고 작업을 주도하였으며, 홍성지역의 촌주를 중심으로 향도집단이 불상 조성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방어산 마애불의 명문을 보면 부모와 중생에 앞서 소성왕과 애장왕으로 추정되는 부자를 위해 조성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그 시기 계속된 천재지변과 기근, 질병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원의 약사상임을 알 수 있다. 발원자인 미도는 대나마의 관등을 가진 것으로 보아 그는 지역사회 촌주 계층의 실력자였을 것이며 마애불의 조성은 개인이 주도한것으로 추“산은 한국인에게 생활신앙의 모태였다. 하늘에 가까이 맞닿은 곳으로 신이 내려오는 성역으로서 숭산 신앙의 뿌리가 깊다. 마애불이 산악에 주로조성된 이유도 그러한 전통을 따른 때문이라 여겨진다. 산신은 본래 현지의신령스런 특정 공간이나 대상에 존재한다고 믿어 왔다. 땅 위에 노출된 거암이 주목을 받았고, 바위의 형태에 따라 신령스러움을 부여했던 것 같다.

 

거북이나 호랑이, 용과 같은 상서로운 동물의 모양을 갖춘 바위, 사람의 형상과 유사한 바위 심지어 기자신앙의 대상으로 남녀성기의 모습을 닮은 바위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인가 그런 특정 바위에 개인이나 가족의 풍요와 다산, 국가나 공동체의 평안과 수호를 기원해 왔고, 그것은 무속적인 형태로 현재까지 존속해 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산악의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곳곳 주요 바위에 이름을 쓰거나 치성을 드리는 행위가 여전한 점으로 미루어서도 알 수 있다. 마애불이 거북 형태나 남녀 성석 등과 함께 공존하는 실상, 그리고 마애불에 전해오는 신화나 전설에도 무불신앙의 혼성이 잘 나타나 있다. 불교가 전파되면서 기존의 토착적 신앙과 어우러짐을 볼 수 있는 측면이다. 마애불이 대부분 산의 8부 능선 아래로 산의 최정상을 피해 조성되어있다. 특정 형상의 암벽에는 마애불을 새기지 않았다. “태안 백화산 동문리마애삼존불, 경주 남산의 칠불암 사면석불과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경주서악 선도산 마애삼존불, 홍성 용봉산 신경리 마애불입상, 함안 방어산 마애약사삼존상, 서울 북한산 승가사 마애불좌상 등 우리나라 마애불의 대표작품의 위치를 감안하면 그러한 측면이 정확히 지켜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이 곧 마애불에 나타난 한국적 불교의 신앙 형태이며, 그 조형적 특징을 창출하게 한 주요 요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초기 마애불인 7세기 전반 경주 단석산 마애불상군은 김유신 장군의 화랑시절 수도처로 알려져 있다. 석실을 이룬 ㄷ자형 암벽의 명문에의하면 절 이름이 신선사이며, 선인으로 추앙받던 화랑과 미륵신앙과의 관계를 시사하는 내용이 밝혀져 있다. 또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의 경주서악 선도산 마애삼존상과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좌상 그리고 9세기경주 남산 삼릉계 상선암 마애불좌상 등이 신선의 지명을 가진 사례들이다. 2) 바위신앙과 마애불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한 마애불에서 바위 신앙의 종교적 뿌리를 찾을 수있다. 바위 신앙은 산악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터인 강변의 암석에도 형성되기도 하였다. 마애불 또한 강변의 벼랑에 새겨진 사례가 많다.

 

바위신앙은 바위에 새긴 암각화를 통하여 그 예를 찿아 볼 수 있다. “암각화는 울산 반구대의 예처럼 수렵과 어로 생활상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한 경우와 울산 천전리, 포항, 경주, 안동, 영주, 고령, 남원 등 기하학적무늬를 새긴 경우로 대별된다. 대체로 청동기시대의 산물로 삼국시대 초기까지 암각화의 제작이 지속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암각화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성소에 새겼을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나라 마애불의 시원으로서 무교적 바위 신앙에서 불교로 변화된 증거가 동일 공간에 남아있는 사례로는 영주 가흥리의 마애삼존불과 암각화를 들 수 있다.”한국의 암석 신앙은 청동기시대 고인돌이나 선돌 같은 삶터에 조성한 거석문화에서도 그 전통을 엿볼 수 있다. 거석문화 계통의 바위신앙에 따라 마애불을 조성하여 마을이나 사찰 입구 혹은 길목에 조성한 마애불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마을 입구를 지키는 예로는 이천 장암리 태평흥국 육년명(981년) 마애보살좌상을 들 수 있고 고갯길을 지키는 예로는 안동 이천동 제비원 마애불과 중원 원풍리마애이불병좌상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마애불에 치성을 올리는 민간의 의례행위 또한 거석신앙과 유사한 점을 보인다. 신령스런 특정 바위에 주먹돌을 문지르며 기원하는 바위형태 바위신앙을 찾아 볼 수 있다. 그 예로 인왕산 선바위에서행하는 붙임바위의 기원방식은 보도각 백불과 원주 치악산 입석사 마애불좌상의 앞에도 주먹돌을 문지르며 소원을 비는 흔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한국 마애불과 미륵신앙의 연관관계 1) 미륵신앙의 근원 미륵신앙이란 미래불이자 당래불인 미륵불의 출현을 갈망하고 이상세계인 용화세계를 꿈꾸는 신앙이라 할 수 있다. 미륵신앙은 석가모니불이 그의제자 중의 한 사람인 미륵에게 장차 성불하여 생한 신앙이다. 이 삼부경은 각각 미륵상생경과 미륵하생경, 미륵성불경의 세 가지 사실을 다루고 있다.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만날 뿐 아니라미래의 세상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좇아 염부제로 내려와서 제일 먼저미륵불의 용화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미륵신앙의 중심은 미륵(Maitreya)이다. 원래 친우를 뜻하는 미트라(Mitra)로부터파생된 마이트레야는 자비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한자 문화권에서는미륵보살을 자씨보살이라고도 불러왔다. 관세음보살을 대비보살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되고 있다.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통속적인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구원론적인구세주의 현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품게 되는이념으로서 지나치게 이론적인 종교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불교가 가질 수있는 구체적인 신앙 형태가 곧 미륵신앙이다. 2) 한국 마애불에서 보여지는 미륵신앙 “삼국시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륵신앙은 우리 생활 속으로 들어와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예로 지명이나 산 이름, 절 이름 등에 미륵, 용화,도솔 등이 자주 쓰였던 것과 미륵불을 봉안한 미륵전과 마애불에 새겨진미륵보살 반가사유상, 미륵신앙에 얽힌 설화가 민간에 널리 퍼진 것도 모두미륵신앙이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있다는 이유로 생각된다. 미륵부처님은‘미륵하생경’114)에 의하면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을 마친 후 중생제도를 위해 사유하는 모습이 미륵반가사유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미륵신앙의 출현은 사회가 혼란스럽거나 왕권의 강화가 필요할 때 대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시대 마애불과 미륵신앙 6세기 백제는 삼국과의 전쟁 후 웅진에서 부여로 수도를 옮긴 후 전쟁으로 인하여 약해진 왕권과 사회적 혼란기를 겪는 시기였다. 이 시기 조성된동문리 태안마애삼존불 가운데 ‘미륵하생경’의 미륵반가사유상이 조성되었다. 불상의 크기 면에서 양쪽의 협시불보다 작으나 관대가 좌우로 뻗은 높은 삼면관을 쓰고 두 손으로는 보배구슬인 봉보주를 감싸고 있다. “삼존의 명칭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법화경’ ‘견보탑품’에 등장하는 도상의 해석으로 볼 때 좌우측에 입불이 현재불인 석가불과 과거불인 다보불로보고 가운데 보살상은 미륵불로 보아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을 표현하여 법화경에서 설하는 수기 사상을 설한 것으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 시기에 미륵불이 조성된 이유를 추론해볼 때 67세기 백제는 전쟁 후 중국과의 교역을 하면서 나라의 부강과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염원하고자 조성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7세기 600년경 서산마애삼존불의 도상에서 주존의 좌보처로 반가사유상이 조성되었다. 본존은 현세불인 석가불로 이 삼존불 또한 법화경 속 과거불인 우협시 연등불의 제화갈라보살과 미래불인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보고 있다. 삼존불의 모습에서 천진한 백제의 온화한 미소를 보이고 있다.

 

마애불은 자연을 경배하고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살던 사람들에게 자연 속신을 부처의 이미지를 투영시켜 조성한 것이다. 마애불은 그 조성 위치에 따라 깊이 숨은 은자의 모습으로, 하늘과 가까이서 삶터를 굽어보는 산신의 모습으로 때로는 땅으로 내려앉아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는 범부의 존재로각자의 성격에 걸맞게 조성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마애불은 백제시대 조성 초기부터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미륵신앙을 담고 발전하였다. “미륵은 56억 7천만년 뒤에 용화수 아래서 성도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미래의 부처이다. 그 미륵의 세상을 꿈꾸고 끊임없이 변화를 갈망하며 인간의 세속적 삶을 반영해온 우리의 마애불은 이상화된 부처의 존재로 하나의 형상에만 머물지 않았다. 때론 어린애 같은 모습으로, 인자한 표정으로, 심통이 가득 차거나 혹은 목에 잔뜩 힘을 주어 권위를 내세운 자세로,인자한 어머니와 같은 편안함으로 혹은 못난이 상으로, 손발이 어색하고 신체 비례를 무시한 자태로 부처의 격식을 완전히 벗은 형태의 마애불까지다채롭게 묘사되어 있다. 한국인의 여러 모습과 마음을 그대로 암벽에 옮겨새겨 놓은 것이다.” 우리의 마애불은 당시의 사람들이 꿈꾸었을 불국토를 향한 마음을 볼 수있는 귀중 사료이며, 종교적 대상과 동시에 예술적 가치를 담고 있는 인류최고의 불교 문화재이자,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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